[르포] 시간과 공간의 중심. 영국 런던,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영국 런던에 위치한 그리니치 천문대 (Royal Observatory Greenwich) /출처: 이봄 교육연구원

2025년 초 영국 런던의 겨울은 한국 못지 않게 매서웠다. 기온은 영하와 영상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했지만, 금방 져버리는 태양과 날선 강바람이 체감 온도를 뚝 떨어트려버렸기 때문이다. 따뜻함을 찾기 위해 이곳을 여행지로 선택한 건 아니지만, 온대 해양성 기후니, 난류니 하는 이야기들을 듣고 와 칼바람을 맞고 있자니 제법 억울하기는 했다.

10년 만에 두 번째로 방문한 런던은 여전히 붐볐고, 지하철은 냄새났으며, 빅벤이나 런던아이와 같은 랜드마크들은 마법을 받은 듯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떠난 이후 시간이 멈춰있다 이제서야 다시 흐른 것만 같았다. 비록 낯선 여행지에서의 설렘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10년 전의 기억과 함께 걷는 도시는 색다른 여행의 기쁨을 알려주었다.

기억 속의 런던을 걷는 것도 좋았지만, 오랜 시간 전 미처 가지 못해 후회가 남았던 곳들을 이번에야말로 경험하고 싶었다. 그 중 한 곳이 바로 ‘그리니치 천문대’이다. 도심과 살짝 떨어진 외곽에 위치한 그리니치 천문대는 방문하기 위해서 반나절 이상을 투자해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10년 전 대학 친구들은 이 먼 런던까지 와서 굳이 시간을 내어 천문대를 간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었고, 그 시절의 나는 그 의문을 타파하고 고집부리기엔 이 장소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상징적인 곳이라기에 갈 수 있으면 좋았을 뿐. 그래서 쉽게 포기하고 친구들과 함께 아이스 스케이트를 타거나 뮤지컬을 보며 여행을 즐겼었다. 세월이 흘러 작은 천문대의 선생님이 된 지금, 어린 시절의 나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그리니치 천문대를 드디어 방문했다.

드넓은 공원을 끼고, 높은 언덕에서 템스강과 런던을 내려다보는 그리니치 천문대는 1675년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찰스 2세에 의해 설립되었다. 정식 명칭은 ‘Royal Observatory Greenwich’,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 찰스 2세는 천문항해기술 발전을 위해 천문대를 세우며 초대 대장이자 초대 왕립 천문학자(Royal Astronomer)로 ‘존 플렘스테드’를 임명했다. 이후 왕립 천문학자들은 한 세기 동안 보다 정확한 천체 카탈로그를 만들어 선원들이 정밀한 항해술을 펼칠 수 있게 도왔다.

그리니치 천문대 뒷편에 설치된 해시계. 돌고래 꼬리의 작은 틈이 아래 판에 비치며 시간을 알려준다. /출처: 이봄 교육연구원

그리니치 천문대에 들어서면 초입부터 다양한 설치물이 우리를 반긴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이 돌고래 모양의 해시계다. 서양에서는 sundial이라 부른다. 돌고래 두 마리의 꼬리가 서로 작은 틈을 두고 마주보고 있다. 이 틈이 돌고래가 물고있는 판에 드리우면 시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둥근 접시 위에 얇은 가시와 같은 시침을 올려 해시계를 만들었다.

그리니치 천문대에 설치된 noon mark. 매월 정오의 해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출처: Wikipedia; author: Christopher St J. H. Daniel

벽면에는 시간 태양의 아날렘마가 그려진 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1년 동안 태양의 궤적을 나타낸 선이다. 매일 같은 시간 태양을 관측하게 되면 8자 모양을 그리며 움직이는 것을 관측할 수 있다. 그리니치 천문대에 정오 즈음에 방문한다면 태양의 그림자가 이 아날렘마 선 위에 정확히 드리우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방문했을 당시는 구름이 많은 날씨라 그림자가 없어 해시계나 아날렘마에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볼 수 없었다.

그리니치 천문대 앞마당에 들어섰을 때, 가장 눈에 띈 것은 관측을 위한 커다란 돔이 아닌 작고 빨간 공이었다. 멀리서도 잘 볼 수 있게 선명한 빨간색으로 칠해진 이 공은 1833년부터 그리니치 천문대의 천문학자들은 매일 오후 1시(13시 00분)에 템스강의 선원들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빨간 공을 1시 5분 전, 기둥 끝까지 올렸다가 정각에 다시 떨어트린다. 원래는 사람의 손으로 태엽을 감아 오르내렸다고. 그리니치 공원의 방문객 역시 이 공을 보거나 그리니치 천문대의 시계와 연동된 셰퍼드 게이트 시계를 확인하여 시간을 확인했다.

실제로 이 공은 그 역할에 충실하여, 방문한 날에도 이 공이 떨어지는 것을 관광객들과 함께 카메라를 들고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은 사람의 손 대신 기계장치가 공을 오르내린다고 한다.

본초 자오선 /출처: 이봄 교육연구원

자오선은 지구 북극과 남극을 연결해 만드는 거대한 원이다. 지구 상의 가로 선은 적도라는 천문학적 기준을 가지고 있지만 세로선(자오선)은 기준이 없었다. 1884년 워싱턴 DC에서 열린 국제 자오선 회의에서 ‘그리니치 천문대를 통과하는 자오선을 본초 자오선’, 그러니까 기준으로 채택하였다. 대부분의 해운 회사들은 이미 그리니치 자오선을 기준으로 한 영국식 차트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회의에서는 세계 시간 역시 본초 자오선의 평균 자정 순간에 시작되어야 한다고 권고했고, 이는 곧 그리니치 평균 시(GMT)가 되었다. 이 전에는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용했던 ‘카나리아 제도를 통과하는 자오선’부터 파리, 베를린, 스톡홀름의 국립 천문대에서 정의한 다른 자오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준 자오선을 이용했다.

세계 시간의 중심이 그리니치 평균 시가 된 이후 세계는 이를 기준으로 착실하게 서로의 시간을 연결했다. 지구는 자전하며 하루(24시간)에 한 바퀴(360°), 한 시간에는 15°씩 회전한다. 즉, 런던에서 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은 런던보다 한 시간 늦게 정오가 찾아온다. 핀란드는 런던에서 동쪽으로 25° 떨어져 있다. 핀란드는 런던보다 약 두 시간 늦게 정오가 찾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핀란드는 GMT에서 두 시간이 더해진 GMT+2를 국가 표준시로 채택했다. 동쪽으로 더 멀리 떨어진 대한민국은 동경127°로, GMT+9를 채택해 표준시로 사용한다.

언덕 아래에서 선명히 보이는 그리니치 천문대의 빨간 공 /출처: 이봄 교육연구원

46억 년 전, 지구가 태어났을 때부터 태양은 지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부터 줄곧, 끊임없이, 단 1초도 낭비하지 않고 태양은 지구를 비췄다. 내 머리 위에 있던 햇빛이 서쪽 땅 아래로 내려간다고 태양은 사라지지 않는다. 옮겨간 태양빛은 지구 반대편의 아침이 된다. 서울의 가장 높은 곳에서 점심시간을 알리는 태양은 동시에 하와이 하늘에서 붉은 노을이 된다. 돌아가는 회전 목마의 시작 점은 어디일까. 돌아가는 지구의 시작 점은 또 어디일까.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겨가며 끊임없이 새벽과 한낮과 노을과 밤을 만들어내는, 시작도 끝도 없는 태양의 도돌이표 사이에서 인간들은 기준점을 만들어냈다. 영국 런던의 한 천문대, 그리니치 천문대다.

‣ 작성 : 별바다 신문 이봄 주임연구원 ( spring@astrocamp.net )